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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가족 풍수 여행,10.30(일) 풍수지리학( 완주익산)-답산후기
  글쓴이 : 明倫     날짜 : 11-10-30 07:14     조회 : 4025    
-온가족 풍수 여행,10.30(일) 8시 30분 풍수지리학( 완주익산) 
 
 율곡서당 매주(목)특강오후7시:1주~4주 “청향회, 원생가족, 전주시민” 성인대상 강의
-율곡서당앞 10.30(일)8시 30분 카플 출발합니다-풍수지리학
-온가족 동반 풍수 여행
-준비물:맜있는 도시락
-경험의 철학:맹신과 미신의 사이(철학과 과학의 미묘한 학문)
 경험철학인 천지인 삼재... 일체의 묘를 배우는 것- 곧 덕숭업광을 생각함
---------------------후기------------------------------------
명덕이네4명,현수네3명,남영이네4명,대인이네3명,회장님,팔산장,춘기네3명이 함께 출발합니다.

1. 여산 송씨 시조 송유익 선생 묘
  (전북 익산시 여산면 호산리 73)

- 억울하게 누명을 쓴 죄인을 풀어주고, 그 음덕으로 명혈(名穴)의 주인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음. 호남 8대 명당이라 불림.  내룡의 지현(之玄) 굴곡. 석룡(石龍)이 특징. 선인취와(仙人醉臥) 형국.
울창한 적송이 좌우비보해주며, 멀리 안산 조산이 여러겹으로 좋다

2. 진주 소씨 소자파, 소세양, 소세량 선생 묘역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192-1)

주산(主山)이 용화산(용호산)으로 뒤에서 보면 호랑이 같다
- 소세양, 소세량 선생의 아버지인 소자파 공의 묘를 중심으로 답산.
  소자파 묘 - 연주형(連珠形) 안산.
  소세양 묘 - 산 대신 물로 안산을 삼는 예.
송도삼절 황진이가 사랑한 유일한 남자가 미륵산 (사자앙천형)자락에 소세양 선비였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3. 진천 송씨 송영구 선생 묘
  (전북 완주군 봉동읍 제내리 1104-1)

- 익산 선비 송영구 선생에게 은혜를 입은 명나라 장원 주지번이
  사신으로 자원해 조선에 온 뒤, 보은(報恩)으로 잡아주었다는 자리.
 전주 객사의 풍패지관(豊沛之館)과 표옹송여구선생의 망모재(望慕齋)의 현판은 주지번의 글씨다.
-아름다운 사제지정의 이야기
표옹과 주지번 사이의 아름다운 사연은 ‘표옹문집’에 기록돼 있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표옹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인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표옹이 그 읊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장작으로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여관 뽀이’인데,
그 주제에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다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너, 그러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하였는가 종이에 써 보아라.”
표옹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표옹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였다.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이었다. 결과적으로 표옹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
즉 지인지감(知人之鑑)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이후로 그는 과거에 장원급제해 임금의 총애를 입었다.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를 자청해  조선에 입국하였다.주지번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비중있는 고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주지번이 교통도 매우 불편했을 당시에 한양에서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사적인 이유에서였다.
주지번은 장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그는 공식 업무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챙겨 표옹의 거처를 방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송영구선생의 묘자리를 점지하며 사제지교의 뜻이 지금시대에도 감동이 느겨지는 바가 크가 할 것이다.
-시대의 명사는  무조건 잡아준 것이 결코 아니라 엄격한 윤리적 기준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윤리적 기준 없이 조자룡 헌칼 휘두르듯이 아무렇게나 명당을 남발하는 지관은 본인 스스로가 하늘의 견책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손이 끊어지는 과보를 받는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주지번이 소점해준 표옹은 평소에 어떻게 살았을까. 생전에 그가 남긴 몇 가지 일화를 보자. 표옹은 52세 때 성주목사를 지냈고, 56세때 경상감사를 지냈는데 관찰사 임기 동안에 아주 강직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낙동강을 투선강이라 부르는 이유는 경상도 관찰사 부임차 배를타고갔다가  관찰사를 그만두고 낙동강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는데 같은 배사공이었다. 그래서 그 뱃사공에게 내가 관찰사로 부임해 갈 때와 올때 무엇이 다른 것이 있나~! 물으니 그 배사공이 하는말 " 갈 땐 빈손 이었는데 올 땐 손에 든 부채가 있구만 요! "하니(= 경상감사를 배웅하기 위해 나루터까지 동행한 이방이 “어르신네가 경상도에 계셨다가 가지고 가시는 것은 손에 쥐고 있는 부채 하나밖에는 없군요”하고 한마디 하니까,) 표옹은 그 말을 듣자마자 손에 들고 있는 부채를 낙동강에 던져버렸다. 부채마저 강물에 던졌다고 해서 당시 사람들이 낙동강에 붙인 이름이 ‘투선강(投扇江)’이다. 그리고 그 부채를 던진 나루터를 ‘투선진(投扇津)’이라고 하였다고 송씨 문중에 전해진다.
투선강과 투선진 이후 강직과 청렴이 진천 송씨들의 가풍이며, 선비정신이 되었다 전해진다

4. ‘두문동 72현 밀양 박씨 박침’의 부인 밀산 박씨 묘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8)

- 밀양 박씨 중 가장 인구수가 많은 규정공파의 실질적인 파시조 라고 전해짐.
  비봉포란(飛鳳抱卵) 형국. 호남8대 명당이라 불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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